하와이 이주민 안원규의 사회·경제적 삶과 민족적 활동(1903~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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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조규태 | 발행기관 | 한국민족운동사학회 | 학술지명 | 한국민족운동사연구 | 권호사항 | No. 115 | 발행연도 | 2023 | 원문보기 | 제공처: KCI |
이 논문은 20세기 전반 미주지역의 대표적 한인 상인이며 독립운동가인 안원규의 사회․경제적 삶과 그의 민족적 활동에 대한 글이다. 그가 하와이에 이주하게 된 배경과 그의 경제적 성장 과정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의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통한 민족운동을 검토하였다. 이 글을 쓰기 위하여 재미 한인이 발간한 국민보 및 신한민보, 일제의 정보문서, 흥사단 문서, 박종수 자료 등을 참고하였다.
1877년 서울의 종로 근처에서 출생하여 경기도 파주의 문산에서 상인의 아들로 성장한 안원규는 1903년 하와이로 이주하여 오아후 와이파후의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하였다. 그 후 그는 양복점을 운영하여 자산 30,000달러의 부자로 성장하였다. 그는 醬油會社를 운영하고, 호놀룰루한인상업회를 설립하여 하와이 거주 상인의 경제적 성장을 꾀하고, 한국의 독립운동과 한인구제 활동을 벌였다.
그는 1904년 경 와이파후농장에 선교 활동인 벌인 하와이감리교회의 교인을 통하여 입교하였다. 신앙 활동에 열정을 다한 그는 1906년 무렵 전도사가 되어 포교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청년회를 조직하고 기숙사를 설립하여 제공하는 등 기독교 청년의 성장을 위하여 힘을 쏟았다. 그리고 이런 배경이 되어 그는 기독교 신자와 결혼을 하였다. 을사조약의 체결 후인 1906년 그는 와이파후공동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1907년 고종의 퇴위와 군대 해산 직후 하와이 한인단체와 합성협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1909년에는 하와이 합성협회와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를 합하여 대한국민회를 조직하고, 다음 해에 이를 대한인국민회로 발전시켰다. 그는 하와이지방총회의 부회장, 재무원, 법무원, 농상무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한인농상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토지를 도급받아 경작하는 사람들에게 자금을 제공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정원명, 박상하, 김종복 등의 친왕적 총회장과 함께 군인과 사관의 양성을 지원하였다. 그는 군사적 성격의 대동공진단을 조직하였고, 1914년 박용만의 대조선국민군단과 사관학교의 운영을 지원하였다.
그는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하와이 지역 한인의 단결과 통합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리고 1941년 4월 하와이에서 해외한족대회를 통해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조직한 안원규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북미 대한인국민회, 이승만의 동지회, 박용만계의 독립단, 한길수의 중한동맹단 등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 미국과 중국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 등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This paper is an article on the socioeconomic life and national activities of Ahn Won-gyu, a representative Korean merchant and independence activist in the Americas in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I looked at the background of his immigration to Hawaii, the process of his economic growth, and Korean integration activities. In order to write this article, I referred to the Kookmin Ilbo, Shinhan Minbo, Japanese information documents, Heungdan documents, and Park Jong-soo data published by Korean Americans.
Born near Jongno, Seoul in 1877 and growing up as a son of a merchant in Munsan, Paju, Gyeonggi-do, Ahn Won-gyu moved to Hawaii in 1903 and worked at a sugar cane farm in Waipahu, Oahu. He then ran a tailor shop and grew rich with $30,000 in assets. He ran a Jangyu(a soy sauce and edible oil) company and established the Honolulu Korean Commercial Association to promote the economic growth of merchants living in Hawaii.
He became a member of the Hawaii Methodist Church in 1904 and became a missionary in 1906. He engaged in missionary work and devoted himself to the growth of Christian youth. In this background he married two Christian ladies.
In 1906, after the signing of Japan-Korea Treaty of 1905, he organized the Wipahu Community. In 1907, shortly after King Gojong's abdication and military dissolution, he organized a Hawaiian Korean organization Habsunghyubhoe. In 1909, the Habsunghyubhoe and the Gongliphyubhoe were combined to organize 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 He worked as a vice-chairman of the Hawaii Regional General Assembly and a board member of agriculture and business. He organized the Daedong-Gong- jin-dan supported the operation of Park Yong-man's Daejoseon National Corps and Military Academy in 1914.
He worked for the unity of Koreans in Hawaii in the late 1920s and 1930s. In April 1941, Ahn Won-gyu organized the Korean-American Federation Committee through an overseas Koreans convention in Hawaii. He tried to integrate the Hawaiian Korean and Korean Americans. He also worked to support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to get approving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by the United States and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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