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취재후] ‘농부 없는’ 농촌…이주노동자마저 떠나는 이유는?2021-11-30 09:51
작성자 Level 10

기사 원문: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333733


지난 9월, 전남 영암군에서 유기농 고구마 농사를 짓는 농민 A씨가 수확철에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일손 부족으로 이주노동자 하루 인건비가 최대 25만 원까지 올라 힘겨워진 농촌 현실이 담겼습니다.

예전에는 '엄마들'이 일손을 보탰습니다. 이제는 고령이 된 '엄마들'은 허리가 굽고, 손이 굽고, 기력이 쇠해져 더 이상 고된 농사일을 못 합니다. 도시 청년들은 돈을 주겠다고 해도 오지 않습니다. 고용허가제로 일하던 이주노동자 1명이 있었지만 얼마 전 제조업으로 이탈했습니다. 남은 A씨 부부 2명이 만 6천 제곱미터(5천 평)의 고구마밭을 수확하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날 A씨는 결국 무허가 인력업체에 전화를 걸어 인력을 어렵게 구했습니다. 대부분 미등록 이주노동자(불법체류자)들입니다. 하루 20명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12명만 왔습니다. 농민 A씨가 이런 방식으로 인력을 고용하는 건 불법입니다. 외국인고용법, 출입국관리법, 직업안정법, 근로기준법 등 각종 관련법에 위배됩니다. 농민도 불법인 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용직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아니면 올해 고구마 수확은 아예 포기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입니다. 일자리 생태계 붕괴, 우리 농촌의 현 주소입니다. 


농촌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삼치잡이가 한창이던 지난달, 전남 여수의 한 정치망 어선에서는 선원 이주노동자 6명이 위험을 무릅쓰고 조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이주노동자 4명이 삼칫배를 떠나 임금을 더 주는 유자망 어선(조기잡이)으로 불법 이탈했기 때문입니다. 어민들끼리 갈등이 불거진 상황 속에 부족한 일손은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채워야 하는 실정입니다. 조선현 여수정치망수협 조합장은 "조업을 하기 위해 바다 위에서도 이주노동자를 뺏고 빼앗기는 상황이 됐고, 곳곳이 불법 천지"라고 한탄했습니다. 


코로나19로 외국인 고용허가제 취업자 수가 줄면서 제조업도 인력 부족에 시달렸습니다. 2019년 15만 명이던 비전문취업(E-9) 입국자 수가 올해 9월까지 9천 6백명으로 감소했습니다. 공장마다 이주노동자를 한 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이 틈에 농어촌 이주노동자 상당수가 제조업으로 빠져나갔습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물론이고, 고용허가제와 계절근로제(E-8)로 농어촌에 취업한 '합법' 이주노동자들마저도 공장으로 향했습니다. 광주광역시의 한 인력업체 사장은 "제조업 일자리가 많다. 농촌 인력을 공장에 안 뺏기기 위해, 다른 지역에 안 뺏기기 위해 이주노동자를 붙잡아야 한다. 이건 전쟁이다"라고 말합니다. 


농어촌에도 일손이 부족한데, 이주노동자들은 왜 이탈하는 걸까요? 물론 악덕 고용주를 견디다 못해 미등록을 선택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업주의 인성 문제를 논하기 전에 이주노동자들이 농어촌을 기피할 수밖에 없는 제도적 허점을 먼저 들여다봐야 합니다.

이주노동자 상당수는 한국어능력시험(EPS-TOPIK) 점수에 따라 업종 배정을 받습니다. 제조업은 200점 만점에 100점 이상 받아야 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80점 이상) 농축산업이나 어업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5인 미만 미법인 사업장이 대부분인 농어촌 이주노동자들은 농민과 같이 근로기준법 63조, 근로시간과 휴게, 휴일 규정을 적용받지 않습니다. 산업재해보상도 제외되고, 임금 체불 시 국가가 일정 금액을 먼저 대신 지급해주는 '대지급금' 제도도 적용받지 못합니다. 제조업 이주노동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어능력시험을 공부하고, 일정 비용을 들여 대한민국 취업 자격을 얻었는데, 농어촌에 배정됐다는 이유로 기본적인 노동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겁니다. 생각지도 못한 차별에 시달리는 것이죠. 사업장을 옮기고 싶어도 고용허가제가 발목을 잡습니다. 불합리한 제도가 이탈을 부추기는 셈입니다. 


농어민들은 "국회의원들이 표심을 얻기 위해 겉만 번지르르한 정책을 내놓는 대신, 먹거리 생산 위기에 처한 농어촌의 현실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강하게 호소합니다. "정부도 제발 현실에 맞는 정책을 마련해달라"고 강조합니다. 정부 부처 실무자들은 "이제는 제도를 바꿀 때가 된 것 같다"고 수긍은 합니다. 고용허가제에 대한 개선 방안에 대한 연구 용역안도 나와 있습니다.

정은정 농촌사회학자는 "이주노동자들이 와서 농사를 지어주지 않으면 농어업이 무너지고 결국 국민의 삶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주노동에 대한 제도적 보완과 인권 신장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라고 강조합니다. 


KBS 뉴스 최혜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