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맨티카 한인사회의 형성과 민족정체성(1916∼1925) |
저자 |
조규태 |
발행기관 |
숭실사학회 |
학술지명 |
숭실사학 |
권호사항 |
Vol.0 No.44 |
발행연도 |
2020 |
원문보기 |
제공처: KCI |
이 글은 1910∼20년대 캘리포니아 북동부의 맨티카에 거주한 한인의 삶과 민족운동에 대한 글이다. 첫째 1916년 맨티카에 한인이 이주한 배경을 사탕무 경작과 관련하여 살폈다. 둘째 맨티카 거주 한인들이 만든 민족공동체인 대한인국민회 맨티카지방회와 맨티카한인감리교회에 주목하여 이들의 정치·사회·경제적 활동을 검토하였다. 셋째 미국의 1920·1923년 토지법으로 인한 맨티카 한인이 재이주와 한인사회의 약화에 대해 고찰하였다.
캘리포니아 북동부에 위치한 맨티카에 60여명의 한인이 이주한 것은 1916년 초였다. 스프렉클 슈거(Spreckels Sugar) 회사가 맨티카에 설탕 공장을 짓고 원료를 확보하기 위하여 사탕무를 재배를 위한 토지를 제공하면서 캘리포니아의 각지에서 농업과 노동을 하던 한인이 맨티카로 몰려들었다.
맨티카의 한인들은 맨티카에서 1∼2, 5∼6 마일 떨어진 농촌에 정착하여 1916년 1,265에이커, 1917년 1,320에이커, 1918년 821에이커에 사탕무를 재배하였다. 사탕무 재배 자 중에서 이익을 본 사람의 경우 1916년의 경우 인당 150∼200달러의 이익을 보았다. 특히 김원택은 600에이커에 말 60여 필과 농구를 갖추고 100여 명의 일꾼을 고용하여 농사를 지었다.
맨티카 거주 한인들은 1916년 4월 20일 미주 한인의 자치기관 겸 독립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의 맨티카지방회를 설립하였다. 맨티카지방회와 그 소속 한인들은 1916년 11월 자치규정을 만들어 한인의 언어·행동·생활 태도를 바로게 함으로써 미국인의 무시와 멸시를 없애고, 경무청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하고 순찰구역 지정을 통해 확보하고, 어린 아이들을 위하여 국어학교인 한흥학교를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맨티카지방회와 소속 한인들은 국치기념일, 대한인국민회 창립일, 추도식 등에 참석하여 망국민의 슬픔을 달래는 것과 아울러 애국가, 독립군가를 함께 부르면서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고취하였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말기인 1917년 미군에 지원한 후 참전하여 향후 미국의 지원을 얻어 독립전쟁 참여를 꿈꾸기도 하였다. 1919년 3월 중순에는 스탁톤, 트레이시 거주 한인들과 독립축하회를 개최하였고, 이후 독립운동자금의 제공과 대한여자애국단의 조직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1921년에는 윌로우즈 항공학교의 비행사 양성 지원, 일제의 식민통치 비판, 국어학교의 교재인 『초등독습』의 편찬 지원 등의 활동을 하였다.
맨티카 거주 한인들은 1916년 2월 12일 지방교회인 맨티카한인감리교회를 설립하였다. 맨티카한인감리교회의 목회는 샌프란시스코한인감리교회와 오클랜드한인감리교회에서 목회와 선교를 한 황사용과 임정구가 담당하였다. 특히 임정구는 1917년 9월부터 맨티카한인감리교회의 교무를 담임하면서, 오클랜드·스탁톤·트레이시 지역의 교회 일도 처리하였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맨티카한인감리교회에는 1917년에 교인 51명, 예비교인 11명, 주일학교 교사 40명, 엡웟청년회원 26명이 있었다.
맨티카한인감리교회의 교인들은 미국 감리교 본부와 캘리포니아 거주 한인 교인들의 도움을 얻어 1918년 9월 독립교회를 세웠다. 맨티카의 교인들은 신앙 활동과 아울러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발전을 염원하였다. 그리고 여성교인들은 1918년 맨티카한인여자전도회를 창립하고 전도와 아울러 민족운동을 전개하면서 여성의 권위를 신장하려 하였고, 어린 아동과 학생을 위해 주일학당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맨티카 거주 한인은 1920년과 1923년 캘리포니아 외국인토지법으로 인해 토지의 임차가 금지되어 도시로 이동해야만 하였다. 부유한 사람들은 샌프란시스코, 스탁톤 등지에 재이주하여 여관업 등 장사를 하였다. 그렇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농촌이나 도시에서 노동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다.
맨티카 한인의 재이주로 맨티카 거주 한인이 격감하자, 대한인국민회 맨티카지방회는 1921년 해체되었다. 그리고 교인의 수도 줄어 맨티카한인감리교회는 스탁톤·트레이시의 교인들과 함께 통합관리되었다. 그리고 국어학교도 1920년대 초 폐교되었으며, 1924년 교회에 의해 부활되었으나 존속이 어려웠다.
This article is about the ethnic lives and national movements of Koreans in Manteca, northeastern California, from 1916 to 1925. First, I examined the background of the Koreans’ migration to Manteca in 1916 and their economic lives. Second, I reviewed their political activities putting emphasis on 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 of Manteca. Third, I reviewed their religious activities in connection with the Manteca Korean Methodist Church. Fourth, I contemplated about the Manteca Koreans’ re-migration and weakening of the Korean community, due to the Land Acts of 1920 and 1923, and the Immigration Law of 1924.
It was in early 1916 that about 60 Koreans moved to Manteca of northeastern California. As Spreckels Sugar Company built a sugar factory in Manteca and provided land for the cultivation of sugar beet to secure raw materials, Koreans who were working and farming in all parts of California flocked to Manteca.
The Koreans of Manteca grew sugar beet at 1,265 acres in 1916, 1,320 acres in 1917, and 821 acres in 1918. Those who benefited from the sugar beet growers saw profits of $150-200 per person in 1916. Especially, Kim Won-taek did beet farming in 600 making use of 60 horses, and hired 100 workers.
The Koreans of Manteca established the Manteca Local Branch of 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 in April, 1916. They made a self-governing rules for mutual friendship, and established and operated the ‘Hanheung School’, a Korean language school.
The Koreans of Manteca, who generally participated in the Manteca Local Branch of 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 did a lot of national activities. They attended at the founding day of 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 and other memorial services. By them, they promoted national awareness and anti-Japanese spirit by singing the national anthem and the independent military song together. They applied the U.S. military in 1917 at the end of World War I, In mid-March 1919, they held a meeting for celebrating the declaration of Korean independence.
The Koreans living in Manteca founded the Manteca Korean Methodist Church, a local church. The ministry of it was headed by Hwang Sa-Yong and Im Chung-gu, who had pastoral and missionary work in San Francisco and Oakland. The Manteca Korean Methodist Church had 51 members of the church, 11 pre-schools, 40 teachers of Sunday school, and 26 members of the Ebworth Youth Association in 1917.
Members of the Manteca Korean Methodist Church established the Independence Church in September 1918 with the help of the American Methodist Headquarters and Korean-Americans living in California. In addition to religious activities, the Manteca believers prayed for the independence of their country. In 1918, women Christians founded the Manteca Korean Women Exhibition Association. And they tried to increase women's authority by doing national movements along with evangelism, and also operated Sunday School for young children and students.
By the way Koreans of Manteca had to travel to cities because of the Alien Land Acts of 1920 and 1923, and the Immigration Law. Rich people did business such as inns in cities. However, poor people earned their living by working in rural or urban areas.
The re-immigration of Manteca Koreans resulted in a drastic decrease in the number of Koreans living in Manteca. In consequence, the Manteca Local Branch of 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 was disbanded in 1921. And the number of church members decreased, so the Manteca Korean Methodist Church was integrated with the church members of Stockton and Tracy. And the Korean language school was closed in the early 1920s, and was revived by the church in 1924, but it was difficult to survive. |